*** 방랑길 ***/방랑의 길 (旅行)

피반령고개

방랑자333 2009. 3. 31. 23:44

 

 

 

청원군 가덕면 청룡리와

보은군 회북면 오동리와의 경계를 이어주는 고개이다.

 예전에 청주에서 보은을 가려면 넘어야 했던 고개.

 

 피반령 !

 

지금은 상주쪽으로 가는 고속도로가 개통되어

 

예전보다 차량은 덜 다니지만

 

특이한 이름을 가진 고개 만큼이나

 

해학적인 사연도 여가가지가 있으니

 

사진과 함께 올려 본다 


 

 

피반령 표지석

 

 

o피반령(1)

오리 이원익 선생이 경주목사가 되어 부임길에 올랐다. 서울에서 청주에 도착하니 경주호장(-지방관서의 우두머리 관리)이 사인교(四人橋-네 사람이 메는 가마)를 가지고 마중을 나와 있었다. 신임사또인 오리대감은 그때부터 사인교를 타고 임지인 경주를 향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는 음력 6월로서 여간 더운 날이 아니어서 걷기조차 힘들었는데 가마를 메고 가자니 그 고통이란 말할 수 없었고 호장은 호장대로 옷이 비에 젖은 것처럼 땀에 젖어 걷기조차 힘들었다. 청주를 떠난 지 한나절쯤 걸어가니 크고 험한 고개가 나타났다. 평지를 걸어도 죽을 지경인데 가마를 메고 한낮에 고개를 넘을 가마꾼도 가마꾼이었지만, 호장이 사또를 보니 겨우 난쟁이를 면한 작은 키에 가마 위에서 천천히 부채질을 하면서 좌우의 산천을 둘러보며 거드럭거리고 있는지라 사또의 지혜를 시험해 볼겸 한번 골려줄 생각이 났다.

호장은 고개 밑에 이르자 가마를 멈추게 한 뒤 사또 앞에 나아가 허리를 굽힌 후,

“사또, 이 고개는 삼남지방에서 제일 높은 고개이온데, 만약 이 고개를 가마를 타시고 넘을 경우에는 가마꾼들이 피곤하여 회인가서 3~4일 유숙하여야 합니다.”하니

“하루속히 당도하여 밀린 업무를 처리할 형편이었는데 도중에 지체할 수야 있느냐? 내 걸어서 고개를 넘을 것이다.”하고 성큼성큼 고개를 걸어 넘다보니 호장이 히죽이죽 웃으며 따라 오고 있었다. 그제서야 호장의 장난을 알아차린 오리대감은 속으로 (이런 못된 놈이 있나?)하고는 걸음을 멈춘 뒤 따라오는 호장을 향하여 “여봐라! 내가 걸어 넘으면 너는 마땅히 기어서 넘어야 하느니라.” 사또의 지엄한 명령에 호장은 양손과 무릎을 발로 삼아 험난한 고개를 기어서 오를 수 밖에 없었다. 고개마루에 올라와 보니 호장의 손바닥과 무릎에는 온통 피가 나와서 차마 볼 수가 없었다. 회인서 하루를 쉬고 이튿날 보은으로 오는 도중에 다시 험한 고개에 닿았고 호장이 또 이 고개를 걸어서 넘으라고 하면 다시 기어 넘으라 할 것이 무서워 나무를 베어서 수레를 만들도록 한 후 수레 위에 사인교를 태운 후 고개를 넘었다고 한다.

이 뒤부터 “피발”이 되어 넘었다 하여 “피발령”, 수레로 넘었으므로 “수레티재”라고 불렀으며, 한문쓰기를 좋아한 사람들에 의하여 피발령은 피반령(皮盤嶺)으로 수리티재는 차령(車嶺)이라 표기하여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는 것이다.

o피반령(2)

광해 10년(1618)에 조의제라는 선비가 상소를 올렸다가 금부에 끌려가 곤역을 당했는데, 그의 아버지 조동준 노인은 고개마루에 올라가 ‘내 아들 장할시고! 내 아들 장할시고!’하면서 덩실덩실 춤을 추다가 목에서 피가 쏟기 시작하므로 이를 본 선비 두명이 노인의 곧고 의리있는 행동에 감동하여 조노인의 시체를 업고 마을로 내려 오는데 무려 아홉 번이나 피를 쏟아 그 때마다 시체를 내려놓고 닦았으므로 이 고개를 피받이고개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자료발췌: 보은 문화원>


 

 

피반령에 서서

 

 

 

 

 

 

 

 

 

 

  구비 구비  피반령고개길 

 

 

 

 

 

 

 

 

 

 

 

 금년초에 풍년농사를 기원하는

8회 피반령 산신제가 지내진 가덕면

피반령 서낭당

 

 

 

 

 

 

 

 

 

 

 

가덕면 남일면 방향

 

 

 

 

 

 

 

 

 

 

 

 

 

 

 멀리 충북 청원군 가덕면 남일면 청주쪽이 보인다

 

 

 

 

 

또 다른 전설이 있어 올려봅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의 명장 이여송으로 하여금 조선을 원조케 하기 위해 출병했다.

이여송이 왜적과의 싸움을 꾀하는 한편 명승지와 산세지리를 살피면서 팔도를 돌아다녀보니

각도 선비를 비롯한 제후장상들이 모두 자연의 정기를 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명나라까지도 예속될 가능성이 있으므로 장차 이 나라에 출중한 인물이 나오지 않도록

미리 예방책을 쓰기로 했다.

 

그리하여 충청도에는 소백지맥을 이루는 피반령을 끊기로 하여 산정에 올라 여덟 군데에

깊은 구덩이를 파게 하고 각각 고추 열가마니씩을 묻은 후 토석을 갈라 내고 불을 지른 뒤

장검을 내리쳤다.  

그러자 검은 암벽이 갈라지면서 붉은 피가 흘렀는데, 그일 후로는 충청도에 인재가 줄었다고 한다.

 또 일설에는 임란이 나기 전에 일본인이 대륙 진출을 꾀하던 중 소소행장이라는 일인이 조선에 와서

승복차림으로 산세를 둘러보니, 틀림없이 이 산에서 장수가 날 것을 알고 산에 쇠못을 박았더니

산에서 피가 주루룩 흘러 그때부터 인근 사람들이 피발령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