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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초:김응현書>영규대사전장기념비

방랑자333 2009. 4. 5. 16:59

 

 

 

 

 

 

 

기허당영규대사전장기적비

    

            (騎虛堂靈圭大師戰場紀蹟碑)

 

 

기허당 영규대사  (?~1592)  

 

 

이비는 정인보 선생이 짓고 김응현선생의 글씨를 새긴비로서 

임진왜란 때 조헌과 함께 승병을 일으켜 청주성 등지에서 왜군과 싸운 영규대사를 기념하기 위한 비이다.

영규대사는 계룡산 갑사 청련암에서 수도하였으며, 휴정(休靜 : 서산대사)의 제자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인들의 침략과 약탈을 참지 못해 승병장(僧兵將)으로 승려 수백명을 이끌고 의병장 조헌(趙憲)과 합세하여 청주성을 수복하였다. 이어 금산 연곤평(延昆坪)에서 왜군과 싸우다가 조헌을 비롯한 칠백의사(七百義士)와 함께 순절하였다. 금산싸움에서 크게 부상을 입고 공주 월암리로 돌아와서 숨을 거두었다. 이 비는 영규대사가 조헌과 함께 청주성을 탈환한 것에 대한 기념비로 1974년 8월 1일 세워졌다.

 

 

 

 

전면

 

 

 

 

 

 

 

 

 

 

 

 

 

 이상 비문 전면

 

 

 

 

 

 

 

 좌측면 전면

 

 

 

 

 

비의 좌측면 글씨들

 

 

 

 

 

 

 

 

 비의 뒤면 글씨들

 

 

 

 

 

 

 

 

 



 

영규대사의 족적은 크지만 평가와 예우는 미약하다.

갑사 보장각과  금산 보석사의 기허당에 모셔진 영규대사 영정이 있지만, 

불교계의 일부분일 뿐 국가적으로 관리하는 내용은 없다.

그러면 조헌선생과 700 의사들은 잘 모셔져 있는데~~~

 

영규(靈圭)대사와 800 의승(義僧)들은 어디로 가셨는가?.

 

임진왜란 때 금산전투에서 승병 800명과 함께 장렬한 최후를 마친 승장 영규대사가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8월초 갑사에서 스님들을 규합해 왜군의 손아귀에서 청주성을 탈환했으며,

그해 8월18일 금산전투에서 의병장 조헌과 함께 전사했다.

그러나 스님을 천대했던 조선왕조의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으로 인해 대사와 800명의 의승은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했으며, 오늘날에도 스님들의 공적은 거의 묻혀져 왔다.

금산의 7백의총에서도 조헌과 700 의사만 있고 영규대사와 800 의승의 흔적은 찾아볼 길이 없다.

갑사를 중심으로 이같은 역사적 무관심과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 나사고 있으니 다행이다.

현재 대사의 유적으로는 대전 계룡면 유평리에 지방문화재인 묘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