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붓글씨로 해서 나무판에 파놓은
좋은 현판과 주련을 보면
어린이 마냥 가슴은 콩콩거리며 두근거린다.
내 블로그 만큼 현판과 주련에 대하여 자료가 있는곳도 드물기도 하지만
그저 좋아서 찍고 그렇게 모은 사진들이 차고 차곡 쌓인다.
어쩌면 이런 모든것들이 세월 앞에서 그리움 일는지도 모른다.
이제 서예로서 남은 풍류나 문화는 아마도 현판과 주련일것 같을 정도로
추택의 구조와 생활방식이 바뀌어 실생활에서 그 효용은 적어 졌다
그래서 애절하게 사명감 같은것이 작용하는지도 모른다.
35년전에 큰 글자로 된 목판본이 있어서 먹을 갈아서 탁본(=인쇄)를 했던 기억이 있어서
문화해설사에게 볼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만, 건물 안마루에 몇 개 있다기에
신발을 벗고 들어가니 현판이라~~~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만, 이를 두고 한말이다.
어찌되었던간에 동춘당에서 본 현판들은
그 당시 내노라던 고위직 정치인들로 지체높은 분들이고
선비들이라서 그런지 글씨 필체 또한 깔끔하여 나를 즐겁게 하였다.
< 동춘당 전경 > < 발췌 : 다음백과사전> 동춘당(同春堂)은 조선 효종 때 대사헌, 이조판서, 병조판서를 지낸 동춘당 송준길(1606~1672)이 48세가 되던 해(1653년)에 지은 별당(別堂)으로 대전광역시 송촌동 동춘당 공원 내에 자리잡고 있으며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209호로 지정되어 있다. 늘 봄과 같다는 뜻의 동춘당(同春堂)은 그의 호를 따서 이름을 붙인 것으로 이곳에 걸린 현판은 송준길이 돌아가신 6년 후 숙종 4년(1678)에 우암 송시열이 쓴 것이다. 건물은 송준길의 아버지 송이창이 세운 것을 송준길이 48세인 효종 4년(1653)에 헌 목재를 그대로 써서 동쪽으로 조금 떨어진 지금의 위치로 옮겨 다시 지었다.
우암송시열 선생 書
아래의 현판(편액)들은
옛날에 정자나 망루 사랑채등에 방문하던 분들이 운(韻)을 띄우고 글을 짓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를 목판에 새겨 남은 작품들이다. 아래 현판 글들의 확실한 내용은 확실히 모르나 대게 운을 띄운 글과 경정 즉 후학이나 후손이 바치는 동춘당에 대한 칭송이나 찬사의 글인 것이 주류다. 송촌의 아파트단지가 들어서기 전에 동춘당이 계족산을 바라보는 비탈에 있어서 바람이 잘 통하여 그런가 ? 이것이 원본이라면 300년 넘은 현판들로서 보존 상태가 아주 좋고 글씨 또한 둔탁하거나 천박하지 않고 깔끔하여 선비 같은 맛이 난다.
우암송시열 선생 書
좌의정,영의정을 지낸 김수항(金壽恒1629~1689)의 글
예조판서 이조판서를 지낸 남용익선생의 신숙 동춘당경정일률(信宿 同春堂敬呈一律)
동명 정두경의 글 정두경(鄭斗卿, 1597년~1673년)은 조선 중기의 문인·학자·시인이다. 본관은 온양이며 호는 동명(東溟)이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었던 삼연 김창흡(三然 金昌翕) 선생이 지은 경제동춘선생구당(敬題 同春先生舊堂)
김진상(金鎭商, 1684~1755, 조선후기 문신) 글
동춘당기 ( 포저 조익선생: 1579 ~ 1655 우의정을 지냄 )
<위 동춘당기를 나누어 찍음 >
마지막으로 뒤에 그 후손이 살고 있는 동춘당고택에 가서 대문 빼끔이 열고 그 후손을 불러서 목판본에 대한 내력을 물어보니 1980년도에 명성그룹 김철호회장에게 팔았단다라고 70넘어 보이는 노파가 답을 한다. 그리고 난 다음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모른단다. 기억을 더듬어 동춘당의 목판본의 행처를 찾기는 했으나 왠지 무언가가 빠진것 같은 그런 황당한 느낌이다 .-무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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