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둘레들 ***/뿌리 (慶州李氏)

돌아보니 오늘의 스승 - 익재 이제현

방랑자333 2007. 8. 11. 20:09

 

 

뭇 선비들의 스승이자 임금의 스승,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글을 지으면 곧 버리다

이제현이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은 이재(彛齋) 백이정(白頤正)이 원나라에서 주자학을 공부하고 십 년만에 돌아온 이후였다. 이제현은 고려는 물론 원나라에서도 저명한 문장가였지만 백이정이 입국하자 곧 그의 문하로 들어가 배우기 시작했다. 불교에도 밝았던 이제현은 새로운 학문이 시작되자 주저하지 않고 문하생이 된 것이다.
이제현에게서 배운 제자 중에서도 스승의 학문을 계승하여 발전시킨 제자로는 가정(稼亭) 이곡(李穀)이 있다. 이곡의 아들 목은(牧隱) 이색(李穡) 역시 주자학에 심취하여 이후 조선 사회에 새로운 규범이 만들어지는데 토대를 마련했다. 이제현은 사상의 흐름이 이루어지는 큰 줄기를 만들어 준 스승이었다.
그는 고려의 조정에서 60여년간 일곱 왕을 섬기며 일했는데 단연 돋보이는 면은 끝없이 서정쇄신을 주장한 점이었다. 그의 활동기는 고려 말, 국운이 기울어지면서 온갖 비리가 난무할 때였다. 충목왕 때는 임금의 스승이 되어 충언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충목왕은 8세였고, 이제현은 58세였다.
그의 충언은 평생의 학문에서 얻은 것이었다. 제자들을 가르칠 때 했던 말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눈과 귀가 향락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잘못을 저지르면 반드시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하며 공을 세우면 상을 줘야 합니다. 그런 과정에서 청탁은 절대 금물입니다. 금이나 은, 또는 비단을 쓸 때는 특히 신중하게 해서 앞으로의 일에 대비해야 하며 세금이나 노역같은 일은 심하지 않나 세심하게 따져 보아서 민생이 괴롭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담이 몸보다 크다는 말을 들었던 이제현이었다. 그런 말은 상소문으로 올리기도 하고, 직접 강의하듯 말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새로운 방법을 만들어 제시하기도 했다.
“임금에게도 잘못은 있을 수 있습니다. 때문에 올바르게 말해 주는 신하가 곁에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마치 구슬에 묻은 티를 숙련된 세공장이가 잘 닦아낸 후에야 보배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학식과 덕망을 갖춘 신하를 두 사람 천거해 드릴 테니 어느 때고 불러 상의하시기 바랍니다.”
조정 대신으로서 그런 주장은 그가 배우고 또 가르쳤던 주자학의 분위기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는 고려의 신하로 살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한 스승이었다. 초야에 묻혀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과 조정에서 해야 할 말을 하며 시비를 가려 주는 일을 혼동하지 않은 스승이기도 했다.
그래서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은 자기보다 2세기 먼저 이 땅에 살다 간 이제현을 가리켜 이렇게 평한 적이 있다.
“옛부터 일컫는 이른바 불후(不朽)라는 것에 세 가지가 있으니 덕(德)과 공(功)과 언(言)이 곧 그것이다. 그러나 덕이 있는 자가 공까지 갖추기 어렵고, 공이 있는 자가 언까지 갖추기 어렵다. 고려 5백년 동안에 세상에 그 이름을 떨친 사람은 많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이 세 가지를 겸비하고 시종이 일치하며 높이 솟아 나와서 아무도 그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만한 사람으로는 오직 이제현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공민왕에게 신돈을 조심하라고 했던 말은 유명하다. 공민왕이 신돈을 지나치게 신임하자 후환을 끼칠 상이니 조심하라고 말했는데 정말 모반을 일으키려다 적발된 것이다.
그때 이제현의 나이는 80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라의 어른으로서, 임금을 가르쳤던 신하로서 그는 입을 다물고만 있지 않았다.
이제현은 평소 글을 지으면 그 자리에서 없애는 기이한 습관을 지니고 있었다. 제자들이 스승의 글을 모아두려 해도 불가능해 그 이유를 묻자 문집은 필요없다는 말로 대신했다. 부친이 문집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들이 만들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 역시 제자들에게는 시사하는 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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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셔온곳 :  록담(鹿潭)의 예절교실